기다림의 상품화|공공의 실패가 만든 새로운 비즈니스
최근 전 세계 곳곳에서 ‘기다림을 줄여주는 서비스’를 판매하는 기업들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공항 보안 검색, 병원 진료, 각종 행정 서비스까지 공공 서비스의 지연과 비효율이 고착화되면서 시간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구조화·계급화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공공의 실패가 민간의 수익 모델로 전환되는 과정, 이른바 ‘기다림의 상품화’라고 진단한다.
✈️ “시간을 팝니다”|공항에서 드러난 기다림의 상품화
미국 교통보안청(TSA)에 따르면 지난 11월 30일, 미국 공항 검색대를 통과한 승객 수는 하루 313만 3924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팬데믹 이전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문제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연방정부 셧다운 여파로 TSA 보안 요원 임금 지급이 중단되면서 대규모 병가와 인력 이탈이 발생했고, 텍사스 휴스턴의 한 공항에서는 보안 검색 대기 시간이 최대 3시간에 달했다.
“보안 검색 대기열이 터미널 밖까지 이어졌고, 여행객들이 공항 바닥에서 밤을 보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 로이터·AP 통신
이러한 병목 현상은 단순한 혼잡이 아니라 인프라 용량 한계, 인력 부족, 정책 실패가 맞물린 구조적 문제라는 분석이 나온다.
💼 ‘마찰 기반 서비스’의 승자, 클리어(CLEAR)
공공 서비스의 비효율은 민간 기업에게 새로운 기회가 된다. 미국 월가에서는 이를 ‘마찰 기반 서비스(Friction-as-a-Service)’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수혜 기업이 바로 생체 인식 기반 보안 패스트 트랙을 제공하는 클리어 시큐어(Clear Secure)다.
| 구분 | 2025년 3분기 실적 |
|---|---|
| 매출 | 2억 2,920만 달러 (+15.5%) |
| 영업이익률 | 23.0% |
| 활성 멤버 수 | 770만 명 |
JP모간은 “공항 혼잡도가 높아질수록 클리어의 경제적 해자(Moat)는 더 깊어진다”며 투자 의견을 상향 조정했다.
클리어는 최근 컨시어지 서비스까지 확대했다. 건당 최대 179달러를 추가로 내면 체크인부터 보안 검색, 탑승구 이동까지 전담 직원이 에스코트한다.
“컨시어지 서비스 확대와 정기적 가격 인상은 멤버십 가치를 높이는 핵심 동력입니다.”
– 캐런 세이드만 베커, 클리어 CEO
🏥 의료 분야로 번진 ‘기다림의 상품화’
의료 영역에서는 기다림이 편의가 아닌 생존의 문제다. 영국과 캐나다에서는 의료 대기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영국 NHS 통계에 따르면, 계획 진료 대기 인원은 740만 명, 이 중 1년 이상 대기 환자만 17만 명에 달한다.
캐나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전문의 치료까지의 중앙값 대기 시간은 28.6주로 1993년 대비 3배 이상 늘었다.
“28.6주 대기는 이제 캐나다 의료 시스템을 정의하는 특징입니다. 사실상 의료 배급제와 다름없습니다.”
– 프레이저 연구소
💳 컨시어지 의료, 기다림 없는 진료의 대가
이런 상황 속에서 컨시어지 의료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연·월회비를 내면 대기 없는 진료, 장시간 상담, 24시간 주치의 접근권을 제공받는 프리미엄 서비스다.
글로벌 컨시어지 의료 시장 규모는 2025년 217억 달러에서 2034년 390억 달러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 효율인가, 기생인가
기다림의 상품화를 두고 평가는 엇갈린다. 일부는 “지불 능력 있는 수요를 분산시켜 전체 시스템 효율을 높인다”고 주장한다.
반면 비판도 거세다.
“부자와 빈자가 같은 줄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동등한 시민으로 인식합니다.”
–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
공공 인프라를 개선하지 않고, 기존의 비효율을 볼모로 ‘새치기 권리’를 판매하는 기생적 모델이라는 지적이다.
📉 경제적 비용과 물가 압력
과도한 대기 시간은 생산성 저하로 이어진다. 프레이저 연구소는 2025년 캐나다에서 의료 대기로 발생한 경제적 손실이 52억 캐나다 달러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또한 무료이던 공공 서비스에 구독료·급행료가 붙으면서 실질 가처분 소득 감소와 서비스 물가 상승 압력도 커진다.
🇰🇷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역시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소아청소년과 진료 ‘오픈런’을 피하기 위해 유료 예약 앱을 사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디지털 유료 줄 서기’라며 디지털 소외 계층의 의료 접근성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이 나온다.
🔎 정리하며
‘기다림의 상품화’는 단순한 신사업이 아니라 공공 서비스의 균열이 만든 구조적 현상이다.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에 가격표가 붙는 사회에서, 공공의 역할과 책임은 다시 질문받고 있다.
🔗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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